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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어느 선생님들 이야기

 

“스마트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은 빼 주세요.”

 

몇 년 전, 연수 담당자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교사들에게는 수업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팁을 제공하라는 요청이다. 바쁜 교사들에게 그것도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반문해 본다. ‘우리는 왜 혁신을 이야기하는가? '어떻게' 이면에 감춰진 '왜'를 이해하고 있는가?’ 

 

연수 시 선생님들에게 설문을 해 보면 실제 혁신에 대한 공감하고 실천 의지를 지니고 있는 분들 못지않게 변화에 대한 피로감과 저항감을 드러내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환경과 학습 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수업에 적용할 시사점을 발견하는 것은 변화하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교사의 역할이 아닐까? 

 

미래교육. ‘아직과 이미’ 사이

위와 같은 상황이 선생님들의 일시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실제, 새로운 정책을 전파하는 연수 장면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물론 연수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으나 선생님들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새로움에 대한 부담감, 저항감 등이 존재한다. 분명 양상은 다르지만,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초기 산업사회 문제의 원인들이 ‘기계’ 자체에 있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한계에 비롯되었던 것처럼, 선생님들이 갖는 부담감과 저항감은 ‘테크놀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공교육 체제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수업 준비에 집중할 수 없는 학교문화, 학생들의 생활지도 등이 여전히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움을 도입하고자 하는 정책은 부담이자 저항하고 싶은 대상이 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시점에서 새로운 교육에 대한 ‘사용법(매뉴얼)’은 그리 중요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 러다이트 운동 당시 기계 자체를 부정하는 현실에서 ‘기계 활용 매뉴얼’을 만들어준들 환영받았을 것인가? 미래교육 역시 아무리 완벽한 ‘안내서’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변화 방향에 대한 자발적 동기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학교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생산양식, 생산관계, 생산력의 관계 

아날로그에 충실한 교사에게 자발적 동기를 제공한 것 중 하나는 마르크스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기존의 생산관계와 생산양식이 이를 수용하지 못할 때 새로운 생산양식이 나타난다.
 

역사발전의 토대를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설명하는 마르크스 철학에 따르면, 사회는 그 둘 간의 모순에 의하여 변화한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에 의해 증폭된 도시 상공업자들의 생산력이 봉건 지주-농노라는 기존의 생산관계와 모순이 발생하였고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보혁명은 어떠할까? 정보혁명은 산업혁명과는 또 다른 형태의 생산력을 증폭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산업화 시기 신흥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과는 다르게 ‘정보’는 인간의 창의성에 의해 생산되고, 소유와 활용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정보혁명과 교육과의 관계를 돌이켜 보면 여전히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현실이다. 요컨대, 정보혁명의 모습들이 우리 교육현장에 도입된 것이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학교교육에서는 우리가 접하는 정보들을 단순히 소비 대상으로서 인식해온 측면이 있다. 

 

2011년 이후, 정부의 ‘스마트교육 추진전략’과는 무관하게 ‘스마트 기술’은 우리 사회에 더욱 깊숙이 들어왔고,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스마트 기술을 통해 증폭된 개방과 공유의 속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정보를 생산하여 유통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혁명으로 인한 변화들을 교실에 도입하는 것은 아이들을 혁명의 주역으로 키우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성장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새로운 사회의 개방성은 실제적인 학습환경을 조성하는데 활용할 수 있으며, 공유성은 자신의 학습활동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고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존재라고 할 때, 학생들에게 어떠한 학습환경을 제공하느냐는 것은 학습기회 혹은 학습습관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단순히 애플리케이션의 소비자로 성장하게 할 것인가? 정보의 주체적 활용자 혹은 생산자가 되도록 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에게 어느 정도 답변의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존 듀이(1938)는 교육자들이 가치 있는 경험을 형성하는데 기여할 모든 것을 학습자들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하여 물리적 환경은 물론 사회적 환경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편, 학교가 비판적인 분별력과 추론 능력을 개발시키지 못한 채, 과다한 내용정보만을 축적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사고능력이 묵살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은 약 100년 전, 존 듀이 시대의 학교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할 때 /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박노해, 1997)

 

 

학교교육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도될 때마다 ‘아직’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면서도 ‘아직’에 절망하여 새로움을 시도할 용기를 저버리는지도 모른다.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미래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요즘,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 교육을 논하기 위한 출발점

이제는 ‘스마트 교육’이란 용어가 크게 조명받지 못한 상황 속에서 심심치 않게 ‘미래 교육’, ‘미래 학교’란 용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를 발견한다. 두 용어의 속성을 면밀히 분석해 보지 않더라도 ‘스마트 교육 = 미래 교육’이라기보다는 ‘스마트 교육〈 미래 교육’이라는 의견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두 용어가 유사해 보이는 이유는 스마트 교육이 갖는 ‘정보 통신 기술 활용’이란 속성이 미래 교육에서 실현될 ‘첨단 학습 환경’과 유사하고, 스마트 교육이 개선하고자 했던 기존의 교육 체제가 미래 교육에서는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개념 정의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개선, 발전, 지속 가능, 첨단 등의 이미지를 미래 교육으로 그려 본다면, 과연 미래 교육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다크에 오기 전 나는 진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라다크는 내게 미래를 향하는 길이 꼭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커다란 힘과 희망을 주었다. (중략) 획일적인 산업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극적인 일이다. 각각의 문화들이 붕괴되면서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값진 지식들이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고 다양한 인종들이 정체성을 위협받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갈등과 사회 붕괴 과정이 뒤를 이었다’ (오래된 미래, p38-41)
 

 

미래 교육이 기존의 교육 혹은 과거 교육에 비해 개선된 모습임을 상상해 볼 때, 그 방법이 곧 스마트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마트 교육이 테크놀로지 활용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측면이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바와 같이 ‘테크놀로지는 거들뿐’이다. 즉, 과거 교육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것이며 이는 혁신을 추구하는 여러 선생님들의 수업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물론, 앞으로는 단순히 거드는 수준의 테크놀로지 활용이 아닌 학습환경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따라서 미래 교육을 논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현재 자신의 수업을 제대로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수업에서 불편한 것이 무엇인가? 기존 수업 방법이 갖는 한계는 무엇인가? 내 수업의 강점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학교교육은 다른 영역에 비하여 폐쇄적 문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성찰할 기회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 관료제적 특성 등이 교사들을 변화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래 교육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선생님들이 스스로 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기보다는 새로운 수업 방식을 수용하는 데 조급증을 갖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미래 교육을 향한 다양한 사례와 모델이 학교 현장에 자리 잡기보다는 일시적인 시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새로운 수업 모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사라지게 되면, 수업의 변화가 학교 현장에서 정착하기도 전에 다시 원래 모습으로 회귀하고, 새로운 영역으로 그 관심이 이동하는 모습들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주변부에 있다고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세상의 중심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오래된 미래, p247)
 

미래 교육을 논하기 전에 그 주체가 누구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교사는 미래 교육에서 변화되어야 할 대상인가, 변화를 이끌어 가야 할 주체인가? 자신이 가진 풍부한 강점을 숨긴 채 무비판적으로 새로움을 시도하고 있다면 형식만 취한 미래 교육이 아닐까? 경험에 비추어 보면, 결코 내 안에서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은 수업은 아이들 앞에서 어떠한 감동도 전하지 못했으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미래 교육은 곧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미래’에서 그 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는 것은 미래 교육을 논하는 출발이며 우리에겐 이러한 발견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재걸(2012)이 제안한 ‘우리 안의 미래교육’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미래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진리를 우리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재걸, 2012, p39)
 

나만의 수업 별자리
맑은 날,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다. 어떤 별들은 밝고, 어둡기도 하며 크기도 다양하다. 별을 관찰하기 위해 가까운 천문대에 가 보면, 연구원들이 설명하는 별자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은 아마도 어릴 적 한 번쯤 들었을 법한 별자리 이름들이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별자리 이야기 중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추억 하나가 생생하다.

 

천문대 별쟁이의 설명

“지금까지 제가 소개한 별자리가 실제 그 모양으로 보이십니까?” 자신을 ‘별쟁이’라고 소개한 어느 천문 연구원이 실컷 별자리를 소개한 후 관람객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물론 별자리들 중 붙여진 이름과 비슷한 모양도 있지만, 대부분은 황소 같아 보이거나 전갈 같아 보이지 않았다.
 

“별자리들은 각각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긴 하나 여러 전문가(위원회)가 정한 이름일 뿐입니다. 아마도 오늘 제가 설명한 별자리를 여러분들이 밤하늘에서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멘트가 끝난 후 별쟁이는 별자리의 연결선들을 지운다.
 

“오늘 저는 여러분만의 별자리 찾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의 사연이 담긴 별자리, 오늘 이 시각, 이 계절에 볼 수 있는, 여러분의 추억이 담긴 별자리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업 방법과 관련해 많은 연수를 받기도 했고, 여러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했다. 어떤 수업 사례들은 해 볼 만한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아마도 나에게 연수를 받은 선생님들 또한 그러리라 생각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하고 싶은 수업이 있고, 할 수 있는 수업이 있고, 할 수 있거나 또는 할 수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사는 각기 다른 맥락에서 자신의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선생님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각기 다른 수업 개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아마도 동일한 강의식 수업, 프로젝트 수업을 준비하더라도 모든 교사들은 서로 다른 특성의 수업을 진행할 것이다.
 

결국, 수업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으며, 각기 다른 맥락에서 선생님 고유의 모델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즉, 모든 교사들은 자신만의 수업 모델을 이미 갖고 있으며 갖게 될 조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별들을 엮여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드는 것과 같이, 각기 다른 특성의 수업 방법과 모형 그리고 자신의 개성, 상황들을 엮어 자신만의 수업 별자리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학교 현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플립러닝 Flipped Learning’(수업에 앞서 학생들이 교수가 제공한 강연 영상을 미리 학습하고, 토론식 강의를 진행하는 형태의 수업 방식)은 교사들의 수업 별자리 만들기라는 관점에서 흥미롭다. 수업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가 학교 현장에 반영된 것과는 달리, 플립러닝은 학교 현장의 실천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경우이다. 존 버그만과 아론 샘즈라는 고등학교 교사들이 플립러닝을 학교교육에 도입해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개인의 성향과 능력, 학교의 지원과 학습자의 태도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겠지만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사들의 끊임없는 시행착오 경험일 것이다. 만약, 교사에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수업 영역의 표준화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력이 제거되며, 실천 과정들이 잘 정리된다면 누구나 다른 교사, 다른 학교에 권할 수 있는 나름의 건강한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미래 교육
2014년 4월, 필자는 미래교육을 실현하고 있는 미국의 학교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미래 학교’라는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 준 ‘미래 교육’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들이 행하고 있던 교육은 ‘미래 교육’에 대한 상식적 이미지 틀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유엔미래보고서 2040' (박영숙 외, 2013)나 Horizon Report(NMC, 2014)에 등장하는 예측된 교육의 모습들이 이들 학교에서는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교직원의 공유된 비전, 교사-학생 혹은 학생-학생 간의 상호 작용 중심의 수업 설계, 교실 환경을 지식 생산 공간으로 보는 관점 등을 자신들의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물론, 학생 1인당 1 기기 환경을 마련하고 있으나 모든 교사가 모든 수업에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최신 단말기를 학생들에게 지급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학생들은 주로 프로젝트 학습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탐색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개인용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통일된 수업 모형에 수업을 맞추기보다는 학교가 설정한 학습의 대원칙(예를 들면, 실제적인 과제, 질문 중심의 수업 등)에 따라 각자의 수업을 실시하고, 학교는 이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그들이 보여 준 미래 교육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어디서 미래 교육을 구할 것인가? 교육의 변화를 꿈꾸고 시도하는 시점에서 변화의 원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아마도 해답은 ‘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이미 우리 속에 들어 있었던 교육의 참모습일 것이다. 또한 교사 각개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개성일 것이다. 덧붙여, 지금 우리가 이미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적 진보들은 오래된 미래 교육, 내 안의 미래 교육을 꺼내어 빛을 발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안의 미래 교육을 발견하는 일도, 이를 실천하는 일도 쉽지 않다. 존 듀이의 오래된 지적처럼 새로운 교육으로 향하는 길은 낡은 길에 비해 수행하기가 더 힘들고 어려운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용기 있는 실천은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아이들 앞에 서는 이유이자 우리에게 부여된 역할이 아닐까?

 


*러다이트 운동: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영국의 공장지대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을 말한다. 노동자들의 임금저하와 구직난이 원인이 되었으나 정부의 탄압과 노동자들 스스로 기계 파괴 운동이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해법이 아님을 자각함으로써 쇠퇴하였다.

 

*박영숙 외 (2013). 유엔미래보고서 2040. 파주: 교보문고

*정재걸 (2012). 동양교육사상의 관점에서 본 가르치기 어려운 시대의 교육. 교육철학, 46, 23-44.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2007. 오래된 미래. 양희승 역. 서울: 중앙books.

*Johnson, L., Adams Becker, S., Krueger, K., & Cummins, M. (2014). NMC Horizon Report: 2014 K-12 Edition. Austin, Texas: The New Media Consortium.

 

 

*참고: 이상의 내용은 계간 우리교육 2015년 봄호에 싣지 못한 글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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